이름 : 노을 
제목 : 돌아온 영웅,스파이더맨2 분석그래서 이 글은 <스파이더맨 2>에 대해 ‘영웅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고,때론 영화 자체와는 관계없는 것들에 대해서도 언급할 수도 있다.
물론 필자는 샘 레이미가 했던 것처럼 이 글을 재미있게 풀 자신은 없다.다만 어린시절부터 영웅물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사람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거나,혹은 같은 감성을 공유하고 싶다.
Chapter 1. 영웅의 도시,뉴욕
<스파이더맨 2>는 뉴욕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다.그러나,그 뉴욕은 우리가 알고 있는 2005년의 뉴욕과는 많이 다르다.
그곳에는 핸드폰을 쓰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듯 하고,TV도 보지 않으며,심지어 인터넷도 쓰지 않는다. 그나마 피터 파커(토비 맥과이어)가 버린 스파이더맨(역시 토비 맥과이어)의 옷을 주워 담아 데일리 뷰글 신문사에 팔아먹는 아저씨가 형편없이 값을 후려치는 편집장 J. 조나 제임슨(J. K 시몬스)에게 “차라리 이베이(=경매 사이트)에 올리는 게 낫겠어!“라고 말할 때 저 사람들이 인터넷을 쓰긴 쓰나 보다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그들이 스파이더맨의 소식을 접하는 것은 오직 뷰글 신문을 통해서고,뷰글 신문사는 스파이더맨의 이미지를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 <스파이더맨 2>의 뉴욕은 핵융합과 고전영화,혹은 시대물에서나 볼법한 뉴욕의 모습이 동시에 혼재하는 곳이다.
‘과학자’들이 만들어내는 기술은 현실감이 없어 보일 정도로 발달해있지만,오히려 사람들이 슈퍼 영웅의 행동을 알게 되고,퍼뜨리는 것은 굉장히 고전적인 방법에 의지한다.
그들은 오직 뷰글 신문사에 의해 스파이더맨에 관한 정보를 얻고(대체 왜 다른 신문사는 스파이더맨의 친구(사실은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이지만)인 피터 파커를 뒤쫓지 않을까?),마치 고대 영웅의 전설을 노래하던 시인들처럼 거리의 악사를 통해 영웅을 칭송한다.
즉,<스파이더맨 2>의 뉴욕은 스파이더맨과 단 하나의 언론사에서만 정보를 공급 받는 신기한 정보 유통경로를 가지고 있는 이상한 나라인 것이다.
왜냐고?그래야 영웅이 살기 편하거든.<스파이더맨 2>속의 뉴욕은 영웅이 자신의 신분을 최대한 안전하게 숨길 수 있고,동시에 영웅의 활약이 극대화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여론의 향배는 오직 하나의 신문사에 쏠려있어 ‘요즘’의 영웅들처럼 인터넷에 정체가 까발려질 위험성도 없고(세상에 2편 중간에서 피터의 얼굴이 공개 되었는데도 디카나 폰카로 사진 찍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니!),그렇기에 사람들은 스파이더맨을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할뿐 스파이더맨에 대한 이러저러한 억측은 그다지 하지 않으며,덤으로 뉴욕의 치안은 영웅 하나가 사라지자 범죄 율이 급증할 정도로 형편없다.
어디 그뿐인가.사람들은 TV도 잘 안 봐서,심지어 메리 제인처럼 한창 뜨고 있는 배우가 TV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연극’(!)에 출연하는 것이 <스파이더맨 2>속의 뉴욕이다.
이것은 슈퍼 히어로 물에서 묘사되는 도시를 전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영화 <슈퍼맨>속에 나오는 뉴욕과 <스파이더맨 2>속의 뉴욕을 비교해서 생각해보라.
편집장이 악질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제외하면,<스파이더맨 2>의 뉴욕은 <슈퍼맨>의 뉴욕과 거의 동일하다.
그만큼 이 영화의 뉴욕은 원형적인 슈퍼 히어로 물에서 꿈꾸는 뉴욕,즉 영웅이 ‘기쁨주고 사랑 받는’ 단순화된 세계에 가깝다.
슈퍼맨이건 스파이더맨이건 배트맨이건,그들이 만약 이런 뉴욕에서 산다면 그들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Chapter 2. 이상한 나라의 멀쩡한 고학생 피터 파커
다만 문제는 이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이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피터 파커라는 사실이다.그래서 <스파이더맨 2>의 문제 제기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엘리스가 겪는 문제와 비슷하다.
‘대체 내가 왜 여기에 떨어졌지?왜 평범한 고학생인 내가 이런 도시에서 영웅노릇을 해야 하는 거지?’
그 질문에 샘 레이미는 이렇게 대답한다.“넌 영웅이니까.”
아무리 피터 파커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해도 그는 어쨌건 영웅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건 <스파이더맨 2>의 엔딩은 ‘결국’ 나름대로 작품 안에서 던졌던 문제를 해결하는 엔딩으로 진행될 것이고,피터 파커는 무슨 방법으로건 영웅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그것이 영웅의 세계다.
분명히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슈퍼 영웅을 그린 영화는 <스파이더맨>말고도 있다.대표적으로 <엑스맨>과 <배트맨>,<헐크>가 있다.
하지만 이 영화들과 <스파이더맨 2>는 다르다.<엑스맨>은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고민하는 돌연변이들이 등장하는 만큼 그 세계도 굉장히 복잡했다.
돌연변이들은 단지 보통의 인간들뿐만 아니라 같은 돌연변이들끼리도 갈등을 일으켰고,싸워야 하는 대상은 미친 과학자뿐만 아니라 언론,정치권까지 다양했으며,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정말 소소한 문제에까지 그들을 괴롭혔다.
<엑스맨>은 영웅물이라기보다 영웅물을 통한 현실 세계의 은유에 가까웠고,그만큼 뭐하나 명쾌하게 결론 날 수 없는 복잡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 <배트맨>은 오히려 동화적인 세계에 가까워서,영웅물을 가장한 일종의 우화,혹은 현대인의 정신분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인간들은 과연 어떤 방법으로 자신을 사회 속에 편입시키는가를 영웅물의 ’가면‘을 쓰고 보여준 것이 <배트맨>이었다.
<헐크>는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감마선에 노출되어 괴물이 되는 슬픈 운명을 가지게 된 남자 브루스 배너와,그런 배너 박사를 ‘자신의 마음에서 유일하게 쓸모없고 나약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헐크의 갈등을 그렸었다.
그리고 이 <헐크>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잘못된 부자관계로 인해 아들을 괴물로 만든 비극’이라는 색다른 의미로 해석했던 것이 이안 감독의 <헐크>였다.
그러나 <스파이더맨 2>는 다르다.<스파이더맨 2>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그의 내부에서부터 생기는 것이라기보다는,오히려 자신이 ‘영웅’이 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다.
피터 파커는 영웅이 되기 전까지는 <엑스맨>처럼 타고난 존재에 대한 회의도,<배트맨>처럼 영웅이 되어서라도 치료해야 할 트라우마도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마치 세탁기에서 스파이더맨의 옷 때문에 알록달록한 물이 들어버린 그의 옷들처럼,비현실적인 ‘영웅’이 되면서 자신의 현실적인 삶까지 망치게 되고,그것이 피터 파커라는 자신의 원래모습까지 변화시킨다.
다른 두 작품의 감독들이 블록버스터 영웅물이라는 제한 속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영웅물을 다뤘다면,샘 레이미는 반대로 영웅물에 정체성의 문제를 끌어들여 영웅물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결점들을 제시하면서,그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극복하는 주인공을 통해 왜 영웅은 영웅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이 악당을 물리치고,여자의 사랑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그런데 그 당연한 결론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나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샘 레이미는 그것을 <스파이더맨 2>에서 비현실적인 영웅물의 세계에 떨어진 현실적인 고학생을 통해 하나하나씩 보여주는 것이다.이것은 <스파이더맨>에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이기도 했다.<스파이더맨>은 기본적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배경을 가진 10대 고교생이 슈퍼 영웅의 힘을 가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슈퍼영웅으로 선택된 남자는 그 힘을 이용해서 자기 먹고 사는 데만 힘쓰고,언론의 조작에 힘을 못 쓰며,심지어 악당과 대결할 때는 시민들의 ‘응원’을 받는 처지가 된다.
아무리 슈퍼 영웅이라도 현실 속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다는 것,그리고 슈퍼 영웅의 힘이 있더라도 평범한 고등학생의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스파이더맨>을 기존 영웅물과 차별화시키는 요소였다.
그에겐 <엑스맨>처럼 든든한 지원자도 없고,배트맨인 브루스 웨인처럼 억만장자도 아니다.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 남보다 좀더 강한 육체와 초능력 뿐이다.
그래서 <스파이더맨>은 지금까지 영웅물들이 당연한 것처럼 해결해왔던 ‘쪼잔한’ 일상,즉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대신 대체 어떻게 <엑스맨> 단체와 브루스 웨인은 그렇게 돈을 잘 벌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끌어들인 영웅물 패러디에 가까웠던 작품이었다.
오히려 <스파이더맨 2>에서 집요하게 추구했던 ‘영웅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큰 힘에는 그 만큼의 엄청난 책임이 동반된다.(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라는,영웅물의 지극히 전형적인 명제를 따르는 것 정도로 정리됐었다.
Chapter 3. 신화적 영웅,모던한 영웅
<스파이더맨 2>는 <스파이더맨>에서 살짝 건드리고 지나갔던 그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들면서,이번에는 영웅물의 패러디가 아닌 영웅물에 대한 ‘논문’을 써나간다.
<스파이더맨 2>의 문제제기 자체는 <엑스맨>과 <배트맨>보다는 단순하다.결국 그것은 영웅의 삶을 선택하느냐,선택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정말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스파이더맨은 대중의 스타이고,그것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충분할 테니 피터 파커가 생활고에 찌들 필요는 없다.
또,<스파이더맨>이 있는 한 악당은 계속 나올 테고,그러니 자신은 메리 제인과 사랑할 수 없다는 피터 파커의 말도 현실적인 세계에서는 굉장히 웃기는 얘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또 미친 과학자가 나와 괴물로 변신할까?하지만 <스파이더맨 2>는 현실속의 ‘인간’이 가진 고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니라,현실적인 주인공과 비현실적인 영웅이 공존하는 세계,뉴욕에서 그 둘의 충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곳에는 끊임없이 초현실적인 악당이 등장하고,영웅은 그것을 막아야만 하는 ‘사명’이 있다.
그래서 현실적인 인물은 비현실적인 세계에 현실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비현실적인 영웅의 세계에 평범한 삶마저 잠식당한다.
그래서 피터 파커는 메리 제인과 같이 할 수 없다.정말 중요한 것은 피터 파커의 정체성이 아니라,비현실적인 영웅의 삶이냐,아니면 현실적인 고학생의 삶을 사느냐에 대한 ‘선택’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영웅물의 첫 번째 문제가 도출된다.왜 피터 파커는 영웅이 될 것인가 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해 그토록 고민할 수밖에 없는가.
물론 표면적으로는 슈퍼 영웅으로서의 비현실적인 삶이 자신의 현실적인 삶을 엉망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영웅들은 영웅물 안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영웅이 가지게 되는 힘이란 결국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실적인 인간세계에서 꼬치꼬치 그 정당성을 따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일종의 신화적인 배경이다.
여기서 깊이 파고 들어갈 것은 아니지만,이는 굳이 따지자면 기독교적 소명의식과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의 모습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신이 내려준 운명을 따라 그 삶에 충실하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신교가 등장하면서 정립된 기독교적 사고관이라면,그 힘을 어떻게 쓸 것인가,과연 신의 뜻에 부합하게 쓸 것인가 아니면 그 힘을 절제하지 못해 신의 형벌을 받을 것인가는 그리스 신화와 연관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각자의 운명이 있듯,영웅들에게는 신으로부터 물려받은 ‘힘’이 바로 그들의 ‘운명’이고,그들은 그 운명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한다.
영웅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거나,아니면 그 운명을 거부하거나.<슈퍼맨>은 그 운명을 단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인 존재이고, <엑스맨>은 그 운명을 거부하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받아들이고자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스파이더맨>은 그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자 ‘회의’한다.
즉, 다른 영웅들이 이미 ‘선택’을 하고,그 선택이 내려준 운명의 굴레를 만끽하거나,혹은 괴로워했다면,그는 선택의 문제에서 갈등 한다.
비현실적인 세상이지만 자신이 영웅이 될 수 있는 세계에 들어갈 것인가,아니면 현실적인 삶,여자친구와 ‘제대로 된’(이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메리 제인에 대해 다루면서 이야기하겠다) 사랑도 하고,공부도 ‘진짜 열심히’ 하며 살 수 있는 삶인가.
기존의 슈퍼 영웅들이 하는 고민의 바탕이 신화였고,그들은 ‘고뇌하는 영웅’의 세계에서 움직였다면,<스파이더맨 2>의 피터 파커가 하는 고민은 보다 ‘모던’한 것이다.
피터 파커는 “오 신이시여!어찌하여 저에게 이런 저주 받은 운명을 주셨나이까?”가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그것이 문제로다”의 세계 속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스파이더맨 2>는 ‘신화’와 ‘연극’을 함께 보여주는 영화다.그의 적인 오토 옥타비우스(알프레드 몰리나) 박사는 신화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몸에 4개의 기계 촉수를 단 저주 받은 괴물 박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지만,동시에 자신에게 저주를 내리는 그 치명적이고 강력한 힘에 대한 유혹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옥타비우스 박사일 때나 닥터 옥토퍼스일 때나 똑같이 “태양의 힘이 내 손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즉,그는 태양의 힘을 원하는,태양에 보다 가까이 가려는 이카루스 같은 존재다.다만,영웅물에서는 신이 없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은 사라지고,그것을 ‘과학’이나 외계인 같은,보다 논리적일 수 있는 것들로 대체할 뿐이다.
뿐만 아니다.닥터 옥토퍼스는 메리 제인을 납치해 ‘물위에 존재하는 폐허’에서 그녀를 ‘쇠사슬’로 묶고,해리 오스본(제임스 프랑코)은 스파이더맨에게 복수하기 위해 총이나 다른 무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라 고대에나 쓰였을 것 같은 긴 칼을 꺼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피터 파커가 진정한 ‘영웅’으로 증명 받는 장면을 생각해보라.그는 닥터 옥토퍼스가 폭주 시켜버린 전철을 힘으로 막기 위해 전철 맨 앞에서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전철을 막아선다.
사람들이 전철의 폭주를 막고 탈진한 피터 파커를 지하철로 옮기는 모습은 슬로우 모션으로 처리되면서 거의 종교적인 분위기로 처리된다(그래서 동시에 웃기기도 하지만).
그리고 그들은 피터 파커를 보며 ‘우리와 똑같이 생긴 청년’이라고 얘기한다.
즉,그는 우리로부터 나섰으되(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났으되),영웅으로(예수로) 부활한 인물인 것이다.
물론 이것은 영웅을 예수와 직접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샘 레이미는 단지 이런 신화적인 배경과 기독교적인 사고를 가진 세계가 바로 영웅물의 원천이었음을 강조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런데 피터 파커는 <헤라클레스>보다는 <햄릿>이 어울리는 인물이다.닥터 옥토퍼스나 해리 오스본의 감정 선은 그리 복잡하지 않고,그들의 표현역시 직설적이다.
물론 그들은 모두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들에 충실하지만,그들의 고민은 과학적 성과와 과학자의 윤리의식사이,친구에 대한 우정과 복수사이와 같은 이분법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피터 파커의 고민은 그렇게 단순한 선택으로 끝나지 않는다.그가 겪는 문제역시 궁극적으로는 선택에 관한 것이지만,그는 끊임없이 그 문제 때문에 쉴 새 없이 고난에 빠진다.
그를 상처 입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복수나 야망 같은 것이 아니라,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출연하는 연극에 시간 맞춰 못 가고,영웅 행세하느라 피자배달을 제시간에 못하는 그런 것들이다.그래서 그가 처한 상황은 디테일한 감정을 풀어내는 ‘연극’에 가깝다.
닥터 옥토퍼스가 쓰는 대사와 피터 파커의 대사들을 비교해보라.닥터 옥토퍼스는 그 스스로 신화적 비극 속의 주인공이 되지만,피터 파커의 감정은 메리 제인이 출연하는 연극 속 대사처럼 보다 미묘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
메리 제인이 출연하는 연극의 대사를 기억해보라.연극 속의 대사들은 그 자체가 메리와 피터 파커의 관계에 대한 은유다.
메리 제인은 피터 파커가 오지 못한 날 극중 여성과의 대화를 통해 어떤 남자를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하고,피터 파커가 온 연극에서는 남자가 ‘나는 어떤 의미에서 사악한 남자였어’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기쁘다’고 이야기한다.
<스파이더맨 2>에서 메리 제인과 피터 파커의 감정은 상당히 간접적으로,때로는 ‘시’까지 동원해서 표현되며(심지어 오토 옥타비우스 박사는 피터를 위해 ‘사랑에 대한 충고’까지 하지 않는가),동시에 ‘메리 제인이 출연하는 연극’이라는 설정은 이 작품의 고전적이며,동시에 신화와 모던의 세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영화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 두 세계를 어떻게 충돌시키느냐 하는 것이다.이 영화의 관건은 결국 이 두 세계의 인물들,즉 슈퍼 영웅의 세계와 평범한 고학생의 세계를 가진 인물들이 어떻게 충돌해 왜 피터 파커가 영웅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충분한 갈등과 논리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스파이더맨>은 그것들을 유머로 돌려서 보여줬지만,그것 자체가 주제인 <스파이더맨 2>는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과연 샘 레이미는 어떤 방법으로 닥터 옥토퍼스의 세계와 피터 파커의 세계를 충돌시켰는가.
Chapter 4. Importance of being earnest
그것은 바로 ‘진지함’이다.메리 제인이 출연하는 연극 ‘진지함의 중요성’은 결국 <스파이더맨 2>의 주제를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 2>는 피터 파커가 ‘슈퍼영웅’ 스파이더맨이 되기 어려운 이유들을 진지하게 파고들어간다.
물론 '스파이더맨‘에서도 현실적인 생활고에 찌든 슈퍼영웅의 모습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축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슈퍼 영웅물을 신선하게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였지 그 문제 자체에 깊이 파고든 것은 아니었다.
사실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에서 돈이 필요했던 이유,그래서 ’알바‘를 뛰어야 했던 이유는 실질적인 생활고 때문이 아니라 메리 제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차를 사려고 했던 것 때문이었고(이는 <스파이더맨 2>에서 아예 한 번 더 상기시켜준다),그만큼 그가 돈 때문에 괴로워할 여지는 적었다.
그래서 돈을 위해 자신이 스스로 스파이더맨 옷을 입고 사진을 찍는 피터 파커의 모습은 진지하기보다는 코믹한쪽에 가까웠다.
그건 보호자가 있는 10대에게 돈 문제는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참고 견딜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피터 파커가 20대의 대학생이 되고,더 이상 경제력을 책임질 보호자가 없는 상황이 된 <스파이더맨 2>에서 피터 파커의 생활고는 더 이상 웃어넘길 수 없는 문제가 된다.
<스파이더맨>에서 피터 파커의 생활문제가 슈퍼 영웅이 사실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다정한 이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스파이더맨 2>의 생활고는 슈퍼영웅이기에 겪어야 할 ‘고통’이다.
샘 레이미는 초반부터 쉴 새 없이 피터 파커를 몰아붙인다.블록버스터 영화답게 영화초반부터 피터 파커는 스파이더맨이 되어 도시 속을 활강한다.
그러나, 그는 피터 파커로 돌아오자마자 피자 배달에 늦었다는 이유로 피자 가게에서 해고당한다.그는 슈퍼 영웅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인생의 기회를 놓친다.
피자 배달에 늦고,메리 제인과의 약속에 늦으며,존 제임슨의 생일 파티에서는 뭘 먹으려 해도 자꾸 누군가가 한발 앞서 그것을 가져간다.
슈퍼 영웅의 삶을 선택하는 한,그는 늘 다른 사람들에게 뒤쳐질 수밖에 없다.그는 메이 숙모와 돈 20달러 때문에 절망해야 하는 불쌍한 고학생일 뿐이다.
슈퍼 영웅 때문에 현실의 삶이 엉망이 되고,샘 레이미는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는다.계속 그 답답한 순간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스파이더맨 2>는 두 가지 부분에서 영웅물의 한계를 뛰어넘는다.하나는 영웅물의 전형적인 설정을 영화 속의 실제 갈등요소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만약 영웅의 정체성 문제만을 따지는 것이라면,<엑스맨>과 <배트맨>처럼 끌고 가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 2>의 뉴욕을 전형적인 슈퍼 히어로가 사는 도시로 만들었고,이런 설정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사실 ’해결‘하기위한 문제,즉 슈퍼 영웅의 활약을 보여주기 위한 문제들이었다.
언론이 영웅을 공격하거나,혹은 일반인으로 살아가면서 여자친구와 갈등을 겪는 다해도 그것은 ’해피엔딩‘을 위한 전형적인 설정들일 뿐이었고(단,여기서 제시하는 것들은 ’영웅 영화‘를 전제로 하는 이야기이다.오랜 시간동안 계속 진화한 영웅물 코믹스의 경우는 얘기가 또 다르다),영웅물에서 정말 보여 주려 하는 것은 영웅의 눈부신 ’활약상‘이었다.
그래서 설정은 설정일 뿐이었고,그 설정에 반응하는 영웅들의 감정은 지극히 가벼워만 보였다.그것은 마치 괴수물에서 스토리가 좀 부실해도,혹은 뻔한 설정들이 어설프게 연결되어있어도 괴수물의 팬들은 그것을 용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그들은 정말 멋지게 도시를 때려 부수는 괴수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
그런데 <스파이더맨 2>는 그렇게 ‘넘어갈 수 있었던’ 설정들 하나하나를 진지하게 파고들면서 영웅물의 장르적 공식을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도 그 안에서 진지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다.
<스파이더맨>에서 뷰글 신문사는 편집장의 코믹한 이미지와 함께 그냥 영웅을 모함하는 웃기는 언론 정도의 역할만을 하지만,<스파이더맨 2>에서는 정말로 피터 파커에게 상처를 입히는 존재가 된다.
<스파이더맨 2>는 영웅의 ‘일상’에 관한 모든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면서 그 설정들 자체에서 오는 문제를 영화의 핵심 스토리로 만들고,비현실적인 세계 속의 영웅이야기에 ‘심리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어느 순간 그저 영웅의 놀이쯤으로 보였던 스파이더맨의 도시 활강은 메리 제인과 존 제임스의 결혼식 뒤에,그리고 피터 파커가 메리 제인을 구출한 뒤 떠나보낸 뒤에 편집되어 이어지면서 무표정한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도 ‘영웅의 고민’을 보여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신나게 멀리서 바라보던 영웅의 이야기가,<스파이더맨 2>에서는 ‘우리의 이웃’이 겪는 괴로움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심리적으로 강한 몰입 감을 줄 수 있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스파이더맨 2>에서 정서적으로 가장 강한 충격을 주는 장면은 스파이더맨과 닥터 옥토퍼스 간의 화려한 대결이 아니라,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의 인생을 포기하고 집에 있을 때 그를 은근히 좋아하는 주인집 딸을 만나는 장면이다.
그는 슈퍼 영웅의 삶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를 잃었고,이제 ‘현실’로 돌아오자 마음은 착하지만 자신과는 코드가 맞지 않을 것 같은(그녀의 옷차림을 기억한다면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이다) 여자가 자신의 앞에 와있다.
만약 이것이 영웅물이 아니라 현실 그 자체였다면,피터 파커는 거기서 그렇게 옛사랑을 떠나보내고,그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슈퍼 영웅의 삶 때문에 나락까지 떨어지는 ‘일상’을 보여준다는 것은,너무나 진지하거나,너무나 가벼운 다른 영웅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지점이다.
평면적 인줄 알았던 뻔한 슈퍼영웅물의 설정들이 캐릭터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입체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해리 오스본이 피터 파커의 뺨을 때릴 때 순간적으로 음악은 정지되고,그 둘 이외의 사람들은 정지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런 차갑고 ‘잔인한’ 느낌을 만들어내는 현실이 일반적인 드라마가 아닌 영웅물이라는 ‘장르’에서 등장했다는 것,그리고 그 이유가 주인공이 단지 심각한 슈퍼 히어로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을 ‘심각하게 만드는’ 건조하고 진지한 현실 때문이라는 것은 영웅물의 또 다른 발전이다.
<엑스맨>과 <배트맨>이 영웅물에서 탄생한 매우 뛰어난 돌연변이라면,<스파이더맨 2>는 장르의 규범 내에서 한층 더 발전된 진화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성과는,<스파이더맨 2>가 이런 진지함을 통해 영웅의 세계를 다시 현실세계로 되돌리고,피터 파커처럼 그 두 세계를 통합해냈다는데 있다.
영웅물을 비롯한 세상 의 모든 장르물은 처음 등장할 때만해도 그 장르물이 등장한 시대적 맥락이나 대중의 심리와 맞닿아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장르가 자리를 잡고 장르의 법칙이 생기기 시작하면,그 장르는 그 안에서 하나의 전형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내며,그런 과정을 통해 어느덧 현실 세계와 유리된다.
그리고 그 현실감이 없어지는 순간,장르물의 숱한 뻔한 작품들은 관객의 몰입 감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하고, 장르의 팬들은 장르의 전형성을 즐기게 되며,일반 관객들은 그것을 뻔하다고 생각한다.
영웅물 역시 마찬가지다.서구사회의 영웅물과 동양사회의 영웅물이 다른 데는 분명히 그 사회의 특성이 기반에 깔려있고,특히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의 주인공들은 그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영웅이었지만,그것이 ‘영웅물’이라는 하나의 장르로 굳어지게 되면서 영웅물은 ‘주인공이 악당을 물리치고 여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뻔한 작품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스파이더맨>는 이미 뻔해질 대로 뻔해진,그래서 사람들이 이제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전형적인 설정들을 진지하게 파고들면서 그것을 현실의 문제로 치환 시킬 수 있도록 만들었다.
<스파이더맨 2>는 영웅물의 공식과 세계관을 상당부분 가져왔으면서도,그 속에서 피터 파커를 ‘우리의 이웃’으로 만들어놓으며 왜 세상에는 (영웅이 아닌) ‘영웅물’이 필요한지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피터 파커와 메리 제인의 로맨스이다.피터 파커와 메리 제인의 로맨스는 그 스토리만으로 따진다면 지극히 전형적인 영웅물의 공식을 따라간다.
영웅은 여자친구와 갈등에 빠져있고,그것은 악당이 여자친구를 ‘납치’한 후,영웅이 그녀를 구원함으로써 해결된다.그러나,<스파이더맨 2>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파고들면서 그들에게 진짜 심각한 갈등과 카타르시스가 존재하는 사랑의 감정을 만들어냈고,그것은 이 영화의 로맨스를 현실에서 이입 가능한 ‘트루 로맨스’로 만든다.
피터 파커와 메리 제인의 사랑은 피터 파커가 반드시 스파이더맨이 아니더라도 벌어질 수 있는,매우 현실적인 사랑이다.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수많은 일을 하는 고학생으로만 설정되어도 그들의 사랑은 이런 모습을 띌 것이며,또한 메리 제인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과 자신의 또 다른 모습 사이에서 고민하는 피터 파커의 모습은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민할법한 문제들이다.
자신은 연인에게 늘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지만,그를 둘러싼 환경들은 그에게 또 다른 고민거리를 안겨주고,거기서 연애의 갈등이 시작된다.
<스파이더맨 2>는 만화를 즐겁게 볼만한 나이의 사람들이 공감하면서 볼 수 있는 연애담을 장르적인 전형 속에 묻지 않고 오히려 영웅물의 관습 속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배치했다.
간단하게 생각해보라.<스파이더맨 2>가 영웅물이 아니었다면 피터 파커와 메리 제인이 그렇게 극적인 ‘고백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반대로,<스파이더맨 2>에 이런 로맨스가 없었다면 이 작품이 다른 영웅물과 차별화될 수 있었겠는가?
<스파이더맨 2>는 현실과 비현실 어느 쪽을 선택하지 않았다.오히려 그것을 통합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황당무계하다고만 얘기하던 그 비현실적인 것들에 대한 진지함을 통해서.
Chapter 5. 메리 제인의 얼굴
그래서 <스파이더맨 2>에서 피터 파커와의 로맨스를 나누는 사람,그리고 그 로맨스의 주인공인 메리 제인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것은 <스파이더맨 2>에서 메리 제인이 차지하는 비중도 비중이지만,메리 제인이 새로운 영웅물에서 차지하는 상징적인 위치 때문이다.
사실상 <스파이더맨 2>의 끝부분은 <스파이더맨>에서 피터 파커가 항상 멀리서만 바라보던 메리 제인을 자신의 옆에 두게 되는 이야기이다.
메리 제인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는지 기억해보라.
메리 제인은 영화 시작에서 오프닝 타이틀과 연결되어 그림으로 등장했다가,어느 순간 대형광고판의 뮤지컬 광고판의 모델 사진이 되며,영화의 마지막 엔딩에서는 피터 파커에게 찾아와 사건을 해결하러 출동하는 스파이더맨을 바라본다.
즉,메리 제인은 그림에서 모델 사진으로,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실물로 피터 파커에게 다가온다.
피터 파커는 영화의 시작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며 현실 속에서는 가난한 피터 파커이기 때문에 그녀와 함께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전형적인 영웅물에서,<영웅의 여자 친구>라는 공식은 영웅물 영화의 스토리를 반드시 진행시켜나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들은 영웅의 사랑을 받지만,그렇기 때문에 악당에게 납치당하고,그래서 영웅을 곤란에 빠뜨리는 존재였다.
그런데 메리 제인의 역할은 조금 다르다.그녀는 영화 후반부에서는 전형적인 위기에 빠진 여자친구의 역할을 수행하지만,동시에 비현실적인 세계와 현실적인 세계에 한발씩 담그고 있는 피터 파커에게는 절대로 다가설 수 없는,현실적인 세계 안의 여성이다.
그녀는 지극히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고,피터 파커는 자신의 비현실적인 삶을 공개하지 않는 한 메리 제인을 잡을 수 없다.
즉,피터 파커에게 있어 메리 제인은 그가 영웅이기에 갖지 못하는 현실적인 삶을 상징한다.
그가 현실적인 삶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그는 메리 제인과 행복할 수 없다.그래서 그는 메리 제인을 옆에 두지 못하고 메리 제인의 포스터로 도배된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 갈등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이 결국 슈퍼영웅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이다.
피터 파커가 메리 제인에게 스파이더맨이라는 것을 밝히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그러나,그 순간 피터 파커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빠져든 비현실적인 영웅의 세계에 메리 제인을 빠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피터 파커의 선택은 딜레마가 될 수밖에 없다.피터 파커는 어느 쪽으로 가도 메리 제인의 사랑을 얻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어느 쪽도 그가 바라는 것을 모두 만족시키지는 못한다.그리고 이것은 <스파이더맨 2> 전체의 딜레마다.
평범한 삶을 선택하자니 슈퍼 영웅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눈에 밟히고,슈퍼 영웅의 삶을 선택하자니 그것이 현실적인 삶을 침범하는 것(혹은,아예 슈퍼영웅이 되어 1편에서 스파이더맨이 언급 했었던 ‘다정한 이웃’으로서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 두렵다.
영웅물에서 영웅의 ‘선택’의 문제는 그래서 중요하다.그것은 개인의 정체성 문제이기도 하지만,동시에 영웅물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미없지만 현실적인 삶인가,아니면 흥미진진하지만 가면 속에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남들을 구해주며, 자신의 '현실적인‘ 삶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인가.
분명히 주인공은 이 둘 중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지만,그 선택이 끝나는 순간,그것은 어쩌면 영웅물을 너무 시시하게 만드는 요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샘 레이미는 이런 문제를 메리 제인을 통해 해결한다.사실 메리 제인이라는 캐릭터는 굉장히 전형적인 영웅물의 여주인공 캐릭터이다.
그녀는 CF 모델이나 뮤지컬 여주인공이 될 정도로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어느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는 전혀 묘사되지 않고,피터 파커와의 로맨스는 진지하지만,그 로맨스 속에서도 그녀가 어떤 성격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그나마 드러난 것이 있다면 <스파이더맨>에서 그녀가 피터 파커를 열심히 옹호할 만큼 적극적인 성격을 가졌다는 것 정도다.
그러나, 이런 메리 제인의 모습은 피터 파커와의 로맨스를 통해 상당부분 가려진다.
피터 파커와의 로맨스가 무척이나 진지하기 때문에 메리 제인이 그렇게 뻔한 캐릭터라는 생각은 그리 들지 않는다.
그러나,샘 레이미는 메리 제인이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인지 확인하기 위해 키스를 하려는 그 순간부터 메리 제인의 정체를 확실히 드러낸다.
메리 제인이 ‘피터 파커’가 아닌 스파이더맨과 키스하려는 그 순간부터 그녀는 슈퍼영웅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고,그때부터 그녀는 ‘슈퍼영웅의 여자친구’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괴물에게 붙잡혀 비명 지르기.닥터 옥토퍼스에게 붙잡혀서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모습은,영락없이 <킹콩>을 비롯한 숱한 괴수들에게 붙잡혀 소리를 지르는 영웅물 여주인공의 모습이다.
특히 메리 제인을 붙잡고 올라가는 닥터 옥토퍼스의 모습은 킹콩에 대한 오마쥬라고 해도 상관없을 정도다.
게다가 메리 제인의 복장을 보라.그녀가 닥터 옥토퍼스에게 붙잡혔을 때의 복장은 원피스이고,이 옷은 닥터 옥토퍼스에게 잡혀있는 동안 조금 찢겨진다.
이것 역시 슈퍼 히어로 물이나 괴수 물에서 등장하는 위기에 빠진 여성 캐릭터의 아주 전형적인 ‘코스튬’이다.
보통의 영웅물은 후반부에서 주인공이 악당의 은신처를 찾아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을 악당으로부터 구출해내면서 해피엔딩으로 이어진다.물론 <스파이더맨 2>도 어느 정도 이 공식에 충실하다.
'스파이더맨 2‘에서 하고자 했던 것은 영웅물의 충실한,그러나 진지한 재현이지 그 공식을 바꾸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샘 레이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피터 파커와 메리 제인의 로맨스를 진지하게 밀어붙이면서 영웅물에서는 존재할 수 없을 것 같았던,믿을 수 없는 한 순간을 만들어낸다.
메리 제인이 스파이더맨의 정체가 피터 파커임을 확인하는 순간,핵융합으로 인해 만들어진 인공 태양 때문에 철로 된 구조물이 넘어지고,스파이더맨은 메리 제인을 구하기 위해 가면을 다시 쓸 틈도 없이 소리를 질러대며 달려가 그것을 떠받친다.
물론 영웅은 당연히 여주인공을 구해야 한다.그러나,후반부에서 이 순간이 오기까지 피터 파커와 메리 제인은 ’영웅물‘이라는 사실만을 제외한다면 보통 영웅물에선 잘 나오지 않는,아주 굉장히 현실적인 로맨스를 진행시켜나갔고,<스파이더맨>는 스파이더맨이라는 ‘영웅‘이 자신의 ’초인적인 힘‘으로 메리 제인을 구출하는 순간,그 로맨스를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
피터 파커의 말대로 죽을지 살지 모를 상황에서 서로의 사랑에 대해 확인하는 이들은 영웅물 사상 가장 ’진지한‘ 로맨스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가장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오히려 가장 현실적이고 진지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서,보통의 로맨스에서 보여줄 수 없는 ’생과 사의 기로에선 사랑‘의 한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의 사랑을 이끌어가는 것은 분명 현실적인 사랑이지만,그것을 폭탄처럼 순식간에 폭발 시키는 것은 비현실적인 영웅물에서 가능한 상황을 통해서다.
즉,샘 레이미는 현실적인 감정과 비현실적인 영웅물의 상황을 통합시킨 것이다.
영웅물에서 정말 진지한,그러나 영웅물의 공식에서는 벗어나지 않는,거대한 과장과 진실한 감정이 뒤섞인 로맨스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스파이더맨 2>가 보여주는 결론이자,<스파이더맨 3>의 전제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스파이더맨>이 소시민의 현실을 영웅물의 세계에 대입해 웃음을 이끌어냈다면 <스파이더맨 2>는 그 두 세계의 갈등을 진지하게 다루다가 그것을 결국 통합해 버렸다.
결국 피터 파커는 영웅의 삶을 받아들이기로 했고,메리 제인은 마지막에 결국 그에게 다가와 그의 삶을 함께 해나가기로 한다.
이로써 현실적인 삶과 영웅으로서의 삶은 하나로 합쳐지고,그 경계는 모호해진다.
이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지만,그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결국 영웅물의 여주인공을 안전하게 만드는 ‘영웅의 정체를 모르는 여주인공’이라는 설정은 더 이상 써먹을 수 없게 되며,메리 제인은 이제 배우로서의 생활과 스파이더맨의 애인의 생활을 동시에 해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스파이더맨 2>의 엔딩은 문제의 종결이 아닌 문제의 확장이고,이제부터는 더욱 심각하게 진행될 것이다.
또한 그것은 단지 강력한 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두 세계의 봉합으로부터 ‘생명력’을 얻은 각각의 캐릭터간의 심리적인 갈등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메리 제인이 피터 파커에게 오기 전,메리 제인과 존 제임슨의 결혼식장에서 클로즈업됐던 세 남자들의 얼굴을 기억해보라.
하나는 해리였고,나머지 둘은 J 조나 제임스와 그의 아들인 존 제임스이다.그리고 이들은 <스파이더맨 2>에서 아직은 평면적인 캐릭터를 보여줬었다.
해리는 마지막 부분에서부터 스파이더맨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증오하는 유약한 남자였고,존 조나 제임스는 그 존재 자체가 원작 만화의 코스프레에 가까울 정도로 원작의 캐릭터를 그대로 옮겨와 희화화한 캐릭터였으며,존 제임스는 <스파이더맨 2>에서 잠깐 나오고 말 것 같은,메리 제인의 그럴듯한 남자친구라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존재감도 없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메리 제인과 존 제임스의 결혼식 씬에서,이 셋은 모두 ‘진지하게’ 변화한다.이미 후반부에서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알고 있는 해리는 얼굴이 비춰지는 것만으로도 그가 3편에서 그린 고블린2로 나온다면 얼마나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을 압박할지 짐작될 정도고,메리 제인의 편지를 읽고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클로즈업되는 존 제임슨 역시 지금까지의 존재감 없는 모습에서 갑자기 3편에서 뭔가를 저지를 것 같은 인물이 된다.
스파이더맨을 싫어하는 J 조나 제임스는 어떤가.그는 이 부분에서 메리 제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 때만해도 여전히 과장된 코믹 캐릭터였지만,메리 제인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갑자기 굳어진 표정이 된다.
아들이 신부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아는 순간,그도 드디어 ‘진지해진’ 것이다.
그리고 존 제임슨과 J 조나 제임슨은 스파이더맨의 정체는 몰라도 피터 파커와 메리제인의 사이는 짐작 될 것이다.
등장 인물들은 모두 진지해졌고,그 진지함의 방향은 모두 피터 파커를 향해있다.
<스파이더맨 2>에서는 피터 파커 혼자만 진지했지만,<스파이더맨 3>는 모든 등장인물이 진지한 채로 스파이더맨/피터 파커를 압박할 것이다.
어쩌면 <스파이더맨 3>는 <스파이더맨 2>보다 더욱 심각하고,비극적인 이야기로 흘러갈지도 모른다.
Chapter 6. 여러분의 다정한 이웃,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 2>는 진지한 작품이다.그러나,앞서도 말했듯 그 진지함은 결국 완전히 영웅의 길을 가기로 선택하는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으로 이어져야‘만’ 한다.
그래서 <스파이더맨 2>의 스토리라인은 어떻게 보면 단순한 듯하지만 철저하게 공식싸움을 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스토리라인에는 반드시 넣어야 할 부분들이 존재한다.
일반적인 영웅물이라면 그것들을 영웅물의 전형에 따라 움직이면 그만이지만,<스파이더맨>과는 달리 그것에 진지하게 접근하는 <스파이더맨 2>는 그럴 수만은 없다.
그래서 <스파이더맨 2>의 관건이 되는 것은 결국 영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과정역시 ‘진지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과연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슈퍼 영웅을 어떻게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설명할 것인가.
샘 레이미는 그것을 스토리 라인 속에서 영웅을 만들어나가는 법칙들을 통해 하나씩 설명한다.
우선 영웅이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힘이 있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과거에는 그것이 신으로부터 받은 힘이었다면,현대에는 과학이다.그래서 스파이더맨과 닥터 옥토퍼스는 같은 곳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과학의 힘으로 다른 생명체와 유사한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러나,이 둘을 갈라놓는 것은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여부,즉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의 명제를 통해서다.
오직 과학의 힘만을 맹신하는 닥터 옥토퍼스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힘을 남용한다.
또한 피터 파커는 해리 오스본과도 한 가지 공통점을 보유하고 있다.
바로 아버지이다.피터 파커는 아버지가 없으면서도 자신의 삼촌에게 아버지 같은 사랑을 받았던 인물이고,반대로 해리 오스본은 아버지가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피터 파커에게 뺏겼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들은 똑같이 ‘아버지’의 명령을 통해 슈퍼 히어로와 잠재적인 악당으로 변신하고,동시에 한다.
삼촌이 유언으로 남긴 말이 피터 파커를 스파이더맨으로 만들었고,해리 오스본은 노만 오스본이 그랬듯,거울을 통해 노만 오스본을 보게 되면서 자신의 ‘길’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때 노만 오스본이 하는 말은 그 유명한 ‘I'm your father'이다. 이것은 이미 전 지구적 슈퍼 히어로의 예시를 보여주었던 예수의 이야기에서부터 수천 년 동안 이어졌던 영웅 만들기의 과정이다.
예수는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세상에 내려왔고,십자가에 못 박혀 고난을 당하는 순간 그 고통에 의해 순간적이나마 아버지를 원망했으며,결국 ’다 이룬 뒤‘ 죽은 다음 부활하여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를 피터 파커에게 대입하면, 그는 삼촌의 뜻에 따라 스파이더맨이 되었다가 현실이라는 고난을 당하면서 위기에 처하고,결국 닥터 옥토퍼스와의 사투 끝에 사람들을 ’구원‘하고 쓰러짐으로서 진정한 영웅으로 ’거듭난‘다.
전철에서 사람들을 구출하고 쓰러지는 피터 파커/스파이더맨의 모습은 그래서 중요하다.
메리 제인과 피터 파커의 사랑이 슈퍼 히어로 물에서만 나올 수 있는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극대화되었듯,피터 파커가 진정한 영웅이 되는 것은 영웅물 특유의 액션 속에서 이루어진다.
앞서 언급했듯 피터 파커는 전철을 막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같은 모습이 된다.
그리고 그때의 그는 그를 영웅으로(신의 아들로) 만들어주는 ‘가면’을 벗은 채로 있다.
즉,그는 슈퍼영웅과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신과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모든 이들을 구출하고(모든 이들을 구원하고) 탈진해 쓰러지면서(죽으면서) 진정한 슈퍼 영웅이 된다.
그의 얼굴을 본 사람들은 그를 두고 ‘우리와 같은 평범한 청년’이라고 이야기한다.즉, 영웅은 평범한 시민 속에서 존재하고(예수가 사람의 아들이었듯),그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때에야 진정한 영웅(신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샘 레이미는 영웅물의 기원을 기독교/신화와 연결시키고,동시에 영웅이란 인간의 본성을 가진 존재이며,더불어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피터 파커가 쓰는 ‘가면’은 단지 피터 파커로서의 그의 정체를 감출 뿐만 아니라,그가 슈퍼 영웅임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증표 같은 것이다.
<스파이더맨>가 둘로 나뉜 한 사람의 모습의 이야기였다면,3편의 이야기는 하나의 근원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진행될지도 모른다.물론, 그 두 명은 피터 파커와 해리 오스본이다.
그러므로 <스파이더맨 2>에서 피터 파커가 영웅이 되기 위해 겪는 고난은 그가 영웅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고,그의 고난이 정점에 오르는 것은 아버지의 의지,즉 삼촌의 말을 거부하고 삼촌의 세계를 떠나면서부터다.
사실 정신적인 이유로 스파이더맨의 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굉장히 비논리적이다.
사실 스토리를 매끄럽게 하기 위해서라면 좀더 그럴듯한 이유를 붙이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샘 레이미는 이것을 통해 결국 아버지의 의지에 반한 영웅,즉 신의 뜻을 거부한 영웅이 겪는 고난이란 곧 그 능력이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신이 내려준 소명을 다하지 않으면서 영웅은 다시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고,영웅의 고난은 최고점에 이르게 된다.
그는 중간에서 잠깐동안 소망하던 평범한 삶을 얻었지만,대신 어떤 불의를 봐도 참고 넘어갈 수밖에 없고,무엇보다도 현실을 ‘탈출’할 수 없다.
피터 파커는 그토록 평범한 현실을 원했고,그래서 잠시나마 만족할만한 생활을 하기도 하지만,결국 그가 얻게 되는 것은 조금 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그리고 메리 제인 대신 집주인 딸이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사실,그리고 다시 스파이더맨이 되기 전처럼 나빠진 시력이다.
슈퍼맨이 평상시의 모습인 클라크 켄트였을 때에는 안경으로 자신의 본 모습을 가렸듯,피터 파커는 영웅에서 시민으로 돌아오자 갑자기 안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터 파커는 어떤 방법으로 영웅으로 돌아올 수 있는가.샘 레이미는 여기서 영웅의 세 가지 조건을 차례로 보여준다.
하나,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더라도 위기에 빠진 사람을 도와줄 것.
<스파이더맨 2>는 몇몇 장면에서 교묘하게 1편과 연결된다.메이 숙모가 1편에서 먼저 음식에 손을 대려는 해리 오스본의 손을 때렸듯 2편에서는 갑자기 은행에 나타난 닥터 옥토퍼스와 스파이더맨의 대결이 벌어지는 사이 금화 한 잎을 슬쩍 하려는 은행원의 손을 때리는 장면이 그저 단순한 개그의 소재라면,거울을 통한 노만 오스본과 해리 오스본의 만남,그리고 삼촌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메이 숙모에게 전하는 피터 파커의 모습은 이 작품이 1편의 연장선상에 있고,그것을 ‘더 진지하게’ 파고들었음을 보여주는 부분들이다.
즉,1편에서 제기됐던 문제들은 2편에서 더욱 확대되어 피터 파커를 괴롭히는 것이다.그저 영웅이 되기 위한 통과제의인줄 알았던 삼촌의 죽음이,2편에서는 메이 숙모와 피터 파커를 갈등케 하는 심각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동시에 1편과 2편의 연관성은 피터 파커를 다시 스파이더맨으로 만드는 단서를 제공한다.
1편 중간에서 아직 자신의 상황에 대해 회의하지 않았던 피터 파커는 화재 현장에 사람을 구출하러 들어가지만,그곳에는 위험에 처한 사람이 아니라 그린 고블린(윌렘 데포)이 있었다.
그런데 반대로 <스파이더맨 2> 중간에서는 더 이상 영웅이 아닌 피터 파커가 화재현장에 아이를 구출 하러 가기 위해 들어가고,이번에는 진짜 아이가 있다.
<스파이더맨>에서의 화재는 스파이더맨과 그린 고블린 간의 액션을 위한 장치였지만,<스파이더맨 2>의 화재는 피터 파커가 영웅이라는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만드는 부분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피터 파커가 영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보다 강력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두 번째로 제시되는 것은 메이 숙모의 ‘영웅론’이다.이삿짐을 도우러 온 피터 파커에게 메이 숙모는 꽤 오랫동안 영웅의 필요성을 말하는데,요약하자면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모델이 될 수 있는 누군가가 항상 필요하고,특히 아이들은 그런 존재가 더욱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터 파커가 뒤에서 오는 트럭을 위험을 감지하는 스파이더 센서를 통해 피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은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냐고 물어보고,다른 영웅물이 그러하듯 사람들은 스파이더맨의 활약에 열광한다.
영웅이란 그런 존재다.평범한 시민들에게 ‘비를 몇 시간씩 맞고서도 보고 싶게 만드는’ 열광적인 존재가 되는 사람.
이 말을 들은 피터 파커는 드디어 영웅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고,1편에서처럼 건물을 뛰어넘어보려 한다.그러나 그것은 실패로 돌아간다.아직 그는 명분은 얻었지만 그 지긋지긋한 이중생활로 돌아가게 만들 정도의 정신적인 의지를 가지진 못한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것이 메리 제인의 납치이다.바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납치되는 것을 보는 순간,피터 파커는 드디어 스파이더맨으로 돌아온다.
처음에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친절,그 다음에는 동네 꼬마가 존경하는 영웅,그리고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영웅이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생기면서,피터 파커는 영웅이 여러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곧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이것은 그가 도둑을 막았다면 삼촌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스파이더맨>의 스토리와도 연결된다).
그래서 평범한 시민 속에 있던 선택 받은 자는 결국 그 운명을 다시 받아들여 영웅이 될 준비를 마치고,악당과의 대결을 통해 영웅이 될 자질을 증명하며,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인정에 의해 진정한 영웅이 된다.
그가 전철을 멈춰 사람들을 구해내고 쓰러지는 순간,사람들은 ‘손을 뻗어’ 스파이더맨을 잡고(샘 레이미는 아예 거미문양이 있는 스파이더맨의 가슴을 클로즈업하면서 사람의 손들을 보여준다),그들의 손으로 스파이더맨을 옮기면서 그들은 스파이더맨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영웅은 평범한 시민 속에서 탄생하고,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그리고 <스파이더맨>과 <스파이더맨 2>는 바로 그 이야기이자,동시에 영웅물의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다.
그저 장르의 공식만을 따른 많은 영웅물들은 그저 영웅의 액션과 과장된 스토리를 즐기면 될 뿐이지만,원래 영웅물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꿈을 이뤄주는 장르였다.
피터 파커 같은 소시민은 현실 속에서는 그대로 소시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그러나,영웅물이라면 피터 파커는 스파이더맨이 되어 자신의 꿈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영웅은 ‘모델’이 될 수 있는 것이다.그건 그가 영웅이기도 하지만,동시에 그 영웅의 시작은 평범한 ‘우리의 이웃’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영웅의 삶은 결과적으로는 일반 시민의 그것과 같아질 수는 없다.닥터 옥토퍼스가 다시 전철에 등장한 순간,사람들은 스파이더맨을 구하기 위해 닥터 옥토퍼스를 막아보지만,피터 파커처럼 선택 받지 못한 일반인들은 닥터 옥토퍼스의 막강한 힘에 밀려날 뿐이다.
아무리 그가 ‘다정한 이웃’이라 할지라도,영웅은 평범한 시민들과 동화될 수는 없다.<스파이더맨 2>는 영웅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고,무엇을 하며,왜 영웅이 있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이것은 영웅물의 논문이 아닌 한편의 영화로서 <스파이더맨 2>가 보여주는 한계이기도 하다.
샘 레이미가 완전히 인간으로 돌아온 피터 파커와,이후 다시 영웅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영웅이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동안,더욱 과학자 캐릭터의 발전이 있었어야 했을 오토 옥타비우스 박사는 결국 몸에 4개의 기계촉수를 장치한 미친 과학자 악당 닥터 옥토퍼스의 모습에 머무르고 만다.
물론 그는 영화 초반에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자로 등장해 좀더 감정이입이 될 수 있는,내면을 가진 캐릭터가 되지만,닥터 옥토퍼스가 되어버린 이후에는 그가 가지고 있는 갈등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마지막에 개심을 하는 모습은 지극히 전형적으로 보인다.
또한 피터 파커가 다시 영웅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스파이더맨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과정역시 그것들을 한데 모았다는 점에서는 독특하지만,결국 영웅물에서 설정한 전형적인 과정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물론 이것들은 그만큼 여러 설정들에 진지하게 접근해서 영웅으로 돌아오는 피터 파커의 모습에 상당한 힘을 실어주기는 했지만,그렇다고 해서 ‘여러 사람을 구하는 영웅’의 당위성에 쉽게 공감하는 피터 파커의 모습은 그에 앞서 보인 현실적인 고민에 비해서는 그 깊이가 얕아 보인다.
하긴,샘 레이미는 그런 것은 그다지 개의치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아마도 <스파이더맨 2>를 통해 보다 진지해진,그러나 여전히 장르의 고전적인 법칙을 따르는 ‘영웅물’을 만들고 싶어 했을 테니까.
Chapter 7. 샘 레이미,전기 톱을 버리고 거미줄을 잡다
<스파이더맨 2>는 <스파이더맨>과 마찬가지로 <다크맨>의 감독이었던 샘 레이미의 영화다.물론 <스파이더맨 2>에서 다루는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는 원작만화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룬 것이긴 하지만,그것을 이렇게 정통적인 방법으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은 샘 레이미의 영향력이 크다.
만약 다른 감독이라면 완성도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스파이더맨>과 <스파이더맨 2>의 이야기를 보다 현대적으로 만들어낼 생각을 했겠지만,그는 오히려 영웅물이 가지고 있는 고전적인 느낌에 충실했다.
즉,그는 영웅물이 가진 전형적인 설정과 스토리라인을 최대한 고수하고,원작의 주제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요즘의 새로운 영웅물들과는 또 다른,고전적이면서도 분명히 그 고전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영웅물을 만들어냈다.
이는 당연히 샘 레이미의 경력에서 비롯된다.그가 연출한 <다크맨>은 물론 그가 제작한 TV 시리즈 <헤라클레스>와 <제나>등은 모두 영웅물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이었고,그가 최근에 연출한 심각한 드라마의 영화들,즉 <심플 플렌>과 <기프트>는 영웅물은 아니었지만 ‘어느날 갑자기 떨어진 큰 힘’(돈,혹은 초능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이미 영웅물을 찍었고,영웅물에 필요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니 그가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찍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스파이더맨 2>는 샘 레이미의 블록버스터 제작이라기보다는,샘 레이미의 평생 숙원사업을 실현한 것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갑자기 다크맨3이 생각난다.)
그리고 샘 레이미는 이 영웅물의 이야기를 영웅물에 대한 논문이자,일종의 오마쥬로 만들었다.
영웅물에 대한 샘 레이미 식의 해석을 제외하면,이 영화는 지나칠 정도로 고전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다.
앞서 언급한 뉴욕이라는 도시의 특성이 그렇고,영화 중간 중간에 신문이 등장해 사건의 전개를 알려주는 진행은 전형적인 고전영화의 편집방식을 따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피터의 숙모인 메이가 닥터 옥토퍼스로 인해 건물에 붙어있는 석상에 우산을 걸치고 매달려있고,그 사이 스파이더맨과 닥터 옥토퍼스가 싸우면서 언제 메이 숙모가 떨어질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주는 장면은 전형적인 히치콕식 편집이다(심지어 스코어까지 그런 분위기를 강화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대로 닥터 옥토퍼스가 메리 제인을 납치해 건물위로 올라가는 장면은 명백한 <킹콩>의 오마쥬다.
즉,그는 영화 곳곳에 이 작품이 고전 영화들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더불어 그것은 이미 고전이 된 <스파이더맨>이 처음 등장했던 시기의 뉴욕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게다가 닥터 옥토퍼스는 굉장히 고전적인 괴수의 모습과 비슷하게 등장한다.그는 등장하기 전에 쿵쿵 울리는 기계 촉수의 발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어느 순간 갑자기 공격을 개시해 평온했던 공간을 뒤 흔들어 놓는다.
이것은 확대 해석하자면 평범한 일상에 침입해 피터 파커의 일상을 뒤흔들어놓는,즉 슈퍼히어로의 세계와 평범한 세계의 경계를 깨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그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굉장히 고전적인 영웅물속 괴수,혹은 악당의 등장 모습이다.
샘 레이미는 영웅물에 대해 탐구하면서,그 영웅물이 연재됐던 그 당시의 느낌까지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스파이더맨 2>는 작품 자체가 영웅물에 대한 오마쥬가 될 수 있는 작품이다.
물론,샘 레이미의 손길이 드러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그는 영화 곳곳에 이 작품이 자신의 것임을 과시하고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그의 전작인 <이블 데드>의 전기톱이 <스파이더맨 2>에서도 등장하거나,혹은 영화에서 드문드문 드러나는 호러와 유머의 결합에서도 나타나지만,보다 중요한 것은 한층 발전한 그의 액션 기법이다.
우선 그는 <이블 데드>에서 악마의 움직임을 표현했던 1인칭 시점의 빠른 공간이동을 <스파이더맨 2>에서 종종 보여주고 있다.
옥타비우스 박사의 등에 달린 인공지능 기계 촉수들이 의사들을 공격할 때,그리고 닥터 옥토퍼스가 전철 브레이크를 부순 후 이 전철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를 보여줄 때 이 기법은 매우 효과적으로 영화의 긴장감을 높인다.
그러나,그것보다 더욱 주목할 것은 닥터 옥토퍼스가 스파이더맨을 움직이게 만드는 방법이다.
전편인 <스파이더맨>에서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의 액션을 대부분 도시 속을 거미줄로 활강하는 스파이더맨의 이미지나 근접전에서 고블린과 대결하며 고블린의 공격을 유연하게 피하는 것 정도로 표현했다.
그러나 샘 레이미는 스파이더맨의 특성을 가지고 보다 다양한,다른 히어로들과는 달리 행동의 제약이 없는 여느 슈퍼 히어로들보다 오히려 더욱 예측 불가능한 액션이 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했고,그것을 <스파이더맨 2>에서 유감없이 보여줬다.
스파이더맨은 기본적으로 거미줄로 움직이지만,닥터 옥토퍼스와의 대결에서 그가 보여주는 액션은 거미줄을 이용한 활강보다는 거미줄이 가지고 있는 유연함과 탄성,얼마든지 거리를 조절할 수 있는 스파이더맨 특유의 공간 활용이 더 강조된다.
닥터 옥토퍼스와 스파이더맨은 모두 멀리 떨어져있는 것들까지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서로 멀리 떨어졌다가,다시 근접전에서도 각자의 무기를 이용해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스파이더맨이 부러진 대형 시계 침을 거미줄을 이용해서 공격하고,그에 이어서는 갑자기 접근해 주먹으로 닥터 옥토퍼스를 공격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예다.
또한 닥터 옥토퍼스의 다양한 공격을 피하는 전철에서의 씬을 보라.스파이더맨은 거미줄을 이용해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을 보여주고,때론 전철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서 현란한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샘 레이미는 영웅물이라는 제약 내에서 정말 모든 것을 다한 것이다.그는 거미인간에게 맞는 액션도 만들어냈고,고전에 대한 오마쥬도 했으며,영웅물의 기원에 대해 설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오마쥬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과 멀어진 영웅의 이야기를 다시 그들 곁으로 가져오는 것이었고,더불어 영웅물의 한 가지 절대적인 전형을 깬 시리즈물을 탄생시켰다.
10대의 불안과 고민,그리고 20대의 고민이 초현실적인 영웅의 스토리 속에 녹아있어 관객이 영웅을 ‘구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공감하고 몰입하게 만들 수 있는 영화,그리고 이미 2편에서 영웅과 그의 적이 서로의 존재를 알고 3편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표출할 수밖에 없는 이상한 ‘심리 영웅물’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스파이더맨>는 <스파이더맨> 이상으로 이 ’시리즈‘를 계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마치 만화가 그렇듯이 말이다.그리고 샘 레이미는 그 모든 것을 해내면서 그것을 영웅물에 대한 거대한 오마쥬이자 논문의 모습으로 이루어냈다.
나오며-Two Thumbs & Two Toes up for your hero. Please
<스파이더맨 2>를 세기의 걸작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아마 일반적인 영화 팬이라면 엄지손가락 하나만 들어도 될 것이고,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팬이라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두 엄지손가락을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굳이 마블 코믹스를 접하지 않았더라도) 어린시절 탤런트 임성민이 주연을 했던 ‘가면 쓴 슈퍼맨’이 등장하는 국내 TV 드라마부터 슈퍼맨의 복장을 했지만 옷의 사용법을 몰라 당황하는 얼치기 슈퍼맨,그리고 <우뢰매>와 <오토맨>(근데 이런 만화 시리즈가 있었던가?)을 거쳐 애니메이션 만화 <배트맨>과 90년대에 KBS에서 방영되었던 <스파이더맨>에 열광하여 결국 <엑스맨>까지 열광했던 사람이라면,<스파이더맨 2>는 두 엄지손가락에 두 엄지발가락까지 들어야 할 작품이다.영웅물의 모든 것,그리고 새로운 시작이 이 작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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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영웅,스파이더맨2 분석
